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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걸어서 세계속으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by PinkRabbit 2020. 9. 7.

20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는 중국정부에서 유적지로 관리하고 있다, 중국 상해의 신천지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역사!!

매번 상해에 가게되면 항상 방문하는 곳이지만 2019년 설립 100주년을 계기로 그 의미를 다시 한번 가슴깊이 되새겨 본다


상해 신천지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1919년 4월 11일 ~ 1948년 8월 15일)는 1919년 3월 1일 경성(京城)에서 선포된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의 망명 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되었으며, 같은 해 9월 11일에는 경성(서울)과 러시아 연해주 등 각지의 임시 정부들을 통합하여 상하이에서 단일 정부를 수립하였다.

수립계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설립되었다.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3월 1일 고종 황제의 장례식(인산일)을 계기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조선이 독립국가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조선 인구 2천만명 중 3.1 만세 시위 참가자는 약 202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했으며, 사망자 7,500여명, 부상자 16,000여명, 체포·구금된 사람이 46,000여명이었다. 만세 시위는 3월부터 시작하여 5월까지도 격렬하게 지속되었는데,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일제 경찰에 연행·구금되어 사실상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3·1 운동으로 표출된 독립 의지를 대표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었다. 1919년 3·1 운동 후 독립운동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 국내외에서 정부수립계획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순종이 건재하고 있어서 망설이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상하이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결집되어 있었다.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한 이들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거듭했다. 먼저 임시 정부 수립론이 대두되었는데, 조선총독부에 맞서 민족의 망명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러나 여운형 등은 정부를 조직하기에는 시기가 이르다고 보고 당 조직을 제대로 갖추고 난 뒤에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이것은 먼저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에 묻혔다.

상하이는 교통이 편리하고 쑨원이 이끄는 광동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조계가 있어서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도 갖추고 있었다. 독립지사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프랑스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조계에 살면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런 까닭에 독립지사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1918년 조직된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상하이는 3·1 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였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1919년 여름부터 더욱 민활하게 움직였다. 신규식을 비롯하여 서병호, 여운형, 조동호, 박찬익, 선우혁 등은 한국과 만주, 연해주, 미주에서 몰려드는 지사를 맞이하기에 바빴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프랑스 조계를 중심으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숙소를 마련해 주고 고려교민 친목회를 조직하여 교민 상호간의 긴밀한 연락망을 만들었다. 이 무렵 만주와 연해주의 이동녕,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조성환, 조소앙 등 명망 높은 독립지사가 상하이로 와서 자리를 잡았고, 한국에서 현순, 손정도 등이 이곳으로 파견되었다.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받을 것을 결의하고 김규식 등을 대표단으로 파견하였다. 김규식은 어릴 때부터 언더우드 학당에 다니면서 영어, 라틴어, 신학, 수학, 과학 등 서구식 교육을 받았고, 서재필이 만든 《독립신문》 기자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유학하여 로노크 대학교 학사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석사를 받은 인재였다. 특히 그는 어학에 능통하여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는 물론이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몽골어, 산스크리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신한청년당의 이름으로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고, 1919년 1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명의로 된 탄원서를 제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아직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을 거절당했다. 김규식은 공식적으로 한국 정부의 대표라는 신임장을 받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 / 출처 위키백과



참, 관람 가능시간은 유의하세요. 그리고 주변에 지하철역이 있어 이동이 편하답니다.

오전 09:00 ~ 11:30(30분 전 마감)
11:30~13:30 점심시간은 관람 불가
오후 13:30 ~ 17:00(30분 전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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